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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번타자 이호준 선수시절 모습

프로야구계 최고의 낙천주의자 이호준

이호준은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4번 타자였다. 1976년 광주광역시 출생으로 광주일고를 졸업했다. 1m85cm, 82kg의 당당한 체구로, 1994년 해태 타이거즈에 투수로 입단했다가 곧바로 타자로 전향했다. 2000년 SK로 이적한 뒤 크게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04년 타점왕에 올랐고 2005년에는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을 했다.

 

낙천적으로 승부를 즐겨라

2005년 10월,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의 준플레오프 4차전이 열린 대전 구장. 홈런포를 터뜨린 이호준은 오른발을 절뚝거리면서 베이스를 돌았다. 무릎에 붕대를 친친 감은 그는 걷는 것조차 불편했지만 뛰고 또 뛰었다. 그는 앞선 3차전에서 안타를 친 뒤 투수 견제 때 1루로 귀루하다가 오른쪽 무릎의 실핏줄이 끊어졌던 것이다. 부상 정도로 봐서는 깁스를 해야 할 처지였지만, 팀이 1승2패로 몰리고 있었다. 그는 진통제를 맞고 출전해 2회 선제 투런 홈런, 6회 2루타를 연달아 터트렸다. 하지만 결국 8회에 투수 윤규진의 볼에 왼쪽 무릎을 맞고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판가름하는 5차전. 양쪽 무릎이 만신창이가 된 이호준은 출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니까 균형을 유지하라고 왼쪽도 부상을 입은 거예요. 4차전보다 더 잘 뛸 수 있어요.”

프로야구계 최고의 낙천주의자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매번 전쟁과 다름없는 게임을 하면서도 이호준은 언제나 여유만만이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유쾌한 뻥쟁이’로 통한다. 질퍽한 남도 사투리로 늘어놓는 넉살이 팀 분위기를 팍팍 살려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는 뜬금없이 ‘여러분, 보너스 1,000만 원씩이 입금됐습니다. 빨리 통장 찍어보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연패로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를 반전시켜보려는 발언이었다. 동료들이 ‘뭐야, 안 들어왔잖아’라며 입을 내밀자 자, 이제 서너 게임만 이기면 포스트시즌 진출이 결정되잖아. 그러면 최소 1,000만 원은 확보하는 셈 아니겠어?’라고 받아친다.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선수들은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연패의 부담을 떨치게 되어, 희망을 품고 게임에 나서곤 한다.

그는 팔방미인이다. 말이면 말, 추진력이면 추진력, 리더십이면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자신감이 넘친다. 야구에서도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다. 투수, 포수, 3루수, 외야수, 그리고 1루수로 출전한 바 있다. 충장중 시절에는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가 구원 투수가 나올 땐 포수자리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는 한 몸인 법. 이처럼 안정되지 않은 포지션이 프로에서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포지션이 바뀌면 곧바로 유니폼을 벗는 게 상례일 만큼, 프로에서는 전공을 바꾸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이호준은 이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켰다.

이호준은 1994년 해태에 투수로 입단했다. 하지만 꽉 짜인 스케줄과 선배들의 강압적인 눈초리가 싫었다. 광주일고 시절처럼 운동을 포기하려는 시도를 몇 차례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코칭 스태프를 찾아갔다. 아버지 이을기 씨는 해태 코치들을 붙잡고 ‘죽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니 때려서라도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이호준이 가장 감사해 하는 사람이 아버지다. 끝까지 아들을 포기하지 않은 아버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남다른 노력 덕택이었을까? 당시 해태의 타격 코치이던 김봉연은 그를 타자로 전향시켰다. 달빛 아래서 함께 타격 연습을 할 만큼 스승과 제자는 한 몸이 되었다. 이호준은 서서히 야구의 묘미를 알게 됐고, 2000년 SK로 이적해서는 대형 타자로 우뚝 섰다.

팀의 간판타자가 된 그에게는 더욱 여유가 생겼다. 스스로를 ‘촌놈’이라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급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4번 타자라는 중압감은 커녕 느긋함만이 엿보일 뿐이다.

가끔은 오히려 잔뜩 긴장한 벤치나 동료들을 골탕먹이는 일도 있다. 야구에서 1점차 승부 상황이 되면 벤치는 극도로 긴장한다. 한방을 치면 역전이나 동점이 가능한 반면 못 치면 지는 결정적인 상황이 종종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공교롭게도 이호준처럼 팀의 중심 타자가 나서야 할 순간에 자주 걸린다. 이럴 때면 으레 감독은 타자를 부른다. 투수의 주무기가 무엇이고, 볼카운트가 어떠니 어떤 점을 유의하라는 등의 지시를 내린다. 그런 다음엔 타격 코치가 붙들고 어느 구질을 공략하라느니 한다. 이어 타자 대기석에 들어서면 동료까지 한마디 거든다. 하지만 이호준은 여기저기서 이야기 듣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짐짓 긴장한 척한다. 어쩔 땐 감독이 불러도 관중의 함성 때문에 못들은 척 그냥 타석에 서는 경우도 있다.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야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야! 공놓고 공치기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

그는 야구를 재미있게 하라고 말한다. 승부에 너무 얽매이면 결과가 안 좋다고 믿는다. 그래서 덕아웃이 떠나갈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웃음을 전파한다.

그가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볼을 던지는 후배 엄정욱에게 조언을 한 적이 있다. 엄정욱은 마운드에서의 제구력 난조 때문에 주전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그는 엄정욱에게 잡초 같은 근성을 길러주기 위해 술과 담배 등을 권했다. 이 결과 대담해진 엄정욱은 시속 161km를 기록하기도 했다. 바른생활은 자칫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적당히 예의를 지키며 쾌활하게 사는 편이, 많은 것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긴장을 한다. 겉으로 보기에 긴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1점차 승부에 나설 때에는 그의 손에서도 땀이 난다. 치면 영웅이 되고 못 치면 역적이 되는 분위기. 갓 입단했을 때에는 이를 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상황. 이호준은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열번 중세 번만 치면 영웅이 된다. 일곱 번 욕먹고 세 번 스타 되자.”

이 같은 성공 경험이 쌓이자 이호준은 승부를 즐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도 타석에 서면 사실 온갖 힘이 되는 것은 다 찾는다.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을 모두 찾으며 ‘도와 주세요’ 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리고 그만의 의식을 갖는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대기석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타석에서 짧게 두 번을 토한다. 그리고는 숨을 머금은 채 투수를 노려본다. 이 상태가 되면 시야가 흔들리지 않고 집중력이 극대화된다.

2002년 시즌 전, 1루수 자리를 놓고 김기태나 강혁과 경쟁할 때 그는 극도로 긴장했다. 김기태와 강혁은 한국의 간판타자였다. 그러나 이호준은 홈런에는 자신이 있었다. 야구는 공격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프로 입단 이후 가장 열심히 훈련을 했고, 결국 주전을 차지했다.

2003년 시즌 직후 연봉 협상을 할 때도 긴장을 한 경우다. 당시 그의 연봉은 8천만 원. 주위에서는 홈런 36개를 친 그의 다음 해 연봉이 2억 5천만 원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때문에 그는 내심 얼마를 줄 것인가에 바짝 긴장을 했다. 하지만 구단은 1억 5천만 원을 제시했고 한순간 긴장은 실망으로 변했다.

그는 수비가 약하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수비 실책도 저지르곤 한다. 때문에 중요한 순간, 특히 위기 상황이 닥치면 ‘제발 나한테 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1루 주위의 돌을 모두 골라낸다. 한국의 프로야구장 1루 주변에 돌이 하나도 없는 것은 모두 자기가 골라낸 덕분이라고 말할 정도다.

프로 입단 2년 만에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이호준. 그는 동료들에게 그때 전혀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고 떠벌린다. 구단에서 해고한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때로는 진솔하게 얘기할 때도 있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죠. 다만 얼굴에까지 긴장을 나타내면 더 긴장하게 되니까 태연한 척하는 겁니다. 또 긴장에서 벗어난 것처럼 행동을 하다 보면 긴장을 잊어버리고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게 되더군요.”  손오공 티비

 


이호준의 TIP 낙천적으로 사는 법

사람들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사는 경향이 있다. 필요한 것만 고민하고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걱정을 사서 하는 사례도 흔하다. 걱정을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냉정하고 긍정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낙천적으로 사는게 능률적이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복잡하게 얽힐 때 내가 마음으로 외치는 세 마디가 있다.

첫째, 인생 뭐 있나!

삶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순간순간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둘째, 세상 무너지나!

일 한번 잘못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실수한번 했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셋째, 좋아하면 하는거지!

관심이 있으면서도 이것 저것 따져보느라 실천하지 못하고 지나면 후회만 남는다. 좋아하면, 하면 그만인 것이다.


 

참조 :  완급 조절의 명수 정민태

“프로야구계 최고의 낙천주의자 이호준”에 대한 3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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