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러거 박찬호는 1973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공주 중동초등학교 때 3루수로 야구를 시작해 공주중학교 3학년 때 투수로 전환하였다.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한양대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료하였다.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이후 텍사스를 거쳐 샌디에이고에서도 활약했다. 1997년 박찬호장학회를 세운 뒤 2000년, 이를 재단법인으로 설립했다.
명상을 통해 다시 박차고 일어선다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의 능력을 맘껏 뽐내고 있는 박찬호는 기수련에 관심이 많다. 2002년 텍사스로 이적한 후 부진에 빠진 그는 몇 차례 애리조나주의 세도나에 다녀왔다. 이곳은 스프링캠프 때마다 찾던 곳이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 다시 박차고 일어나기 위해서다. 8만여명의 주민 중 예술인이 30%나 되는 세도나는 인디언 원주민들이 신성시했던 신비의 땅이다. 붉은 색의 기이한 바위산과 경치들로 인해 신비감이 감도는 이곳은 많은 명상가와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박찬호도 해마다 스프링캠프나 피닉스 원정을 나설 때면 이곳에 들르곤 한다. 2005년 텍사스와 샌디에이고에서 그동안의 부진을 털고 화려하게 재기한 데에는, 2004년 겨울 세도나에서 기 수련을 한 것이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기에 관심이 많은 박찬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선문답 같은 글을 자주 올린다. 내용은 대부분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데, 대개는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광속구의 원동력 ‘배짱훈련’
박찬호는 신중한 성격 때문에 ‘새 가슴’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마운드에서 타자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공을 뿌려대는 스타일이 아니라. 이리 저리 코너워크를 하고 지루하게 승부를 끌어가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담력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 ‘새가슴론’의 요지다. 이에 대해 얘기하면 그는 그저 웃어 넘긴다. 어쩌면 중학교 시절 공동묘지 훈련이 생각나서일지도 모른다.
중학생 박찬호는 어느 날 자신의 담력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공동묘지를 생각해냈다. 낮에 지나가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는 공주시 웅진동 공동묘지. 어린 박찬호는 밤에 혼자 그곳을 찾았다. 첫 날은 입구에서 등을 돌렸다. 다음 날에는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묘지의 비석을 만지는 데 성공했다. 이후 2주일 동안 그는 몇 차례 그곳을 찾아 1,000번의 스윙을 하고 그림자 피칭을 했다.
다음 단계는 음산한 산성 공원 훈련이었다. 당시의 산성 공원은 낮에는 낭만적인 휴식처였지만, 인적이 끊어진 밤에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한 곳이었다. 박찬호는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소나무 그림자의 공포를 이겨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스윙에 스윙을 계속했다. 박찬호는 3학년 내내 산성에서 밤마다 개인 훈련을 했다. 박찬호는 지금 메이저리그 타자들 앞에서 광속구를 뿌릴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당시의 배짱훈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다.
내 사전에 적당히는 없다
그런 자신에게 새가슴 운운하는 것을 듣고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사실 그는 새가슴이 아니라 완벽주의자에 더 가깝다. 무슨 일이든 꼼꼼하고 세밀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내인 것이다.
운동을 할 때에도 완벽하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해, 미국 진출 초창기에는 트레이너들로부터 제지를 당한 적도 있었다.
이런 그의 성격은 집에서도 나타난다. 방 안의 정리 정돈은 기본이다. 그 외에 있어서도 항상 주변이 깔끔하고 깨끗하다.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 허리 부상이 있기 전까지는 위력적인 강속구와 넘치는 자신감으로 타자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허리 부상 후 4년에 6,5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받고 텍사스로 팀을 옮기고 나서는 그만큼의 부담감과 책임감 때문에 좀더 완벽한 피칭을 하려다 낭패를 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의 약속에 철저한 박찬호는 세도나 행을 택했고, 결국은 명상을 통해 다시 박차고 일어설 힘을 얻은 것이다.
강력한 자기 암시로 메이저리그를 정복하다
박찬호는 인생의 중요 시기 때마다 자기 암시를 시도했다. 중학교 시절 공동묘지와 산성에서 강력한 자기 암시로 배짱을 키운 그는 지난 91년, 청소년 대표로 가게 된 미국 LA에서 메이저리그를 관전했다. 이때부터 그는 빅 리그에서 뛰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당시에는 메이저리그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곳인지 잘 몰랐기에 그저 상상이 곧 현실이라고만 믿었다. 정말로 빅 리거가 된다는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였다.
그러나 빅 리그와 마이너리그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모르던 지난 94년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게 되자 자신을 잘 추스르지 못하기도 했다. 한국과 미국 언론의 뜨거운 취재 열기 한가운데에서 자기 암시도 효과가 없어 흔들린 시기였다.
2002년 LA에서 텍사스로 이적할 때에는 6,500만 달러의 대박을 터뜨리면서, ‘정말 멋진 투수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참선 등을 통해 집중력을 키웠지만 부상이 심해 2004년까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5년 샌디에이고로 옮기면서, 드디어 그의 자기 암시 노력이 효과로 나타났다. 부상 중에도 상대 타자를 멋지게 삼진시키는 이미지 트레이닝과 함께 묵상을 계속한 결과, 자신감 충만한 특급 스타의 위용을 되찾은 것이다.
박찬호의 자기 암시는 스스로 최면에 걸릴 정도로 반복된다. 목표와 훈련 방법, 태도, 승리하는 짜릿한 장면의 상상을 만족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박찬호가 관심을 가진 신성한 땅 세도나, 이곳을 잘 말해주는 표현이 있다. 코스트 샐리시 족 추장인 댄 조지의 말이다.
“가슴과 가슴, 마음과 마음이 통할 때까지 우리들의 융합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그대는 여기에 몸만와 있는 것이다.” 손오공 티비
박찬호의 TIP : 인생을 바꾼 자기 암시
박찬호의 성공은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과 연관이 깊다. 그에게는 ‘적당히’라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그는 이것을 마음 수련을 통해 푼다. 명상 등 차분한 마음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인생의 중요 시기에 박찬호가 해왔던 자기 암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반드시 야구로 성공한다. 초등학교 시절 여느 선수들과 똑같이 생활했던 그가 중학교 시절부터는 야구로 입신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둘째, 빅 리그에서 뛰겠다. 사람은 꿈에 의해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박찬호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야구의 최고봉인 메이저리그를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셋째,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빅 리그에 진출한 뒤에는 상대 투수를 분석,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마음속에 그렸다. 삼진시키는 호쾌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자신감을 더욱 키웠다.
참조 : 아시안 특급 박지성 : 이 경기장에선 내가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