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렬은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인으로 1963년 광주광역시 출생이다.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한국이 우승을 한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주역으로 활약했고,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에서 통산 146승 40패에 132세이브의 기록을 남겼다.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도 10승 4패에 98세이브를 기록했다.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을 거쳐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우승한 경력이 있다.
있어야 할 그곳은 높은음자리
‘무등산 폭격기’, ‘국보 투수’, ‘나고야의 태양……. 언제나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 데 이어, 사령탑에 오른 첫해에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삼성 전감독 선동열.
그의 성공 요인은 선수로서는 탁월한 기량, 감독으로서는 뛰어난 용병술과 조련술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판단력’이라는 것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그는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해야 할 말을 안다. 이곳저곳에서 그를 부르지만, 거기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자리를 보는 눈이 있다는 얘기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로 진출할 때에도 그랬고,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삼성에서 내디딜 때에도 그랬다. 투수는 일반적으로 두뇌가 뛰어나다. 보통 20년이 넘도록 타자와의 볼카운트 신경전을 비롯한 수 싸움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수는 수학을 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 중에서도 선동열의 계산은 특히 치밀하고 빠르다. 그는 선수 시절에 이미 자기 몸값을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해태에 입단하던 지난 1985년에 애틀랜타 등 메이저리그 세 개 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던 그는, 언젠가는 외국으로 진출하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라 더 이상 도전할 곳이 없는 한국을 떠나 일본이나 미국에서 1인자가 되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꿈의 실현을 위해 그가 가장 철저히 한 것은 몸 관리였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아예 출전을 기피할 정도였다. 억지로 등판했을 때에는 ‘특급 투수가 저럴 수 있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엉망인 피칭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태업설도 흘러나왔다. 물론 본인은 지금도 부인하고 있지만. 심지어는 당시 서릿발 같은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통제하던 김응용 감독도 그의 행동을 묵인해 줄 때가 있었다. ‘동열이 아프답니다’라는 유남호 투수코치의 보고를 들으면 ‘언제쯤 등판할 수 있는데……………?”라며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김감독도 더 큰 무대에서 뛰어야 할 제자를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선동열은 1992년 4월 11일, OB의 홈 개막전에서 5안타 16탈삼진 완봉승의 역투를 했다.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군 5대0의 승리. 그는 이 날 이후 투수에게 흔히 발병하는 건초염에 시달렸다. 그리고는 아예 3개월을 푹 쉬었다. 당시 해태 마운드는 자기가 없어도 될 정도로 강하기에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7월 7일 빙그레와의 광주 경기에서 세이브를 따내는 등 8연속 세이브를 올리기는 했지만, 그 해 성적은 85년 데뷔 이후 가장 나쁜 2승 8세이브였다.
그러나 그 3개월을 쉰 덕분에 그는 쌩쌩한 어깨를 보전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96년 일본 주니치에 진출하면서 4년간 약 170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의 뛰어난 포지셔닝은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으로 활약한 2002년과 20003년에 돋보인다. 슈퍼스타 출신인 그를 감독으로 영입하려는 각 구단의 움직임은 집요했다. 박용오 한국야구위원회 총재가 회장인 두산을 비롯해 SK, LG, 삼성, 기아 등이 적극성을 보였다. 실제로 2003년 말 두산 구단은 선동열의 영입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김인식 감독을 아웃시키기까지 했다. 한편 SK나 LG, 삼성 등도 최후의 베팅을 준비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감독이 아닌 수석 코치로 해태 타이거즈 시절 은사인 삼성 김응용 감독의 품에 안겼다.
당장 감독에 대한 미련도 많았으나 광주 출신으로 대구에서 지도자를 하는 것이 지역 통합이라는 대의 명분에도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스타로서, 지역 경쟁 심리 구도로 형성된 프로야구를 지역 화합의 단계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실천한 것이다. 물론 김응용 감독의 뒤를 잇는다는 것과 삼성 구단의 풍부한 물질적 지원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트 시절 그의 포지셔닝은 아예 빵점에 가까웠다. 1989년 지금의 아내가 된 김현미 씨를 소개받은 그는, 여느 연인처럼 거리를 걷기도 하고 영화관을 찾기도 했다. 그런데 함께 길을 걸을 때 여성을 길 안쪽에서 걷게 해주는 매너를 몰랐던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안쪽에 서고 여자 친구를 위험한 도로 쪽에서 걷게 했다. 그리고는 도로 쪽의 여자 친구는 바라보지도 않고 주로 왼쪽만 쳐다보고 걷곤 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에 김현미 씨는 ‘이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하는 걸까?’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1루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자꾸 왼쪽을 돌아보는 투수의 습관에서 기인한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 야구를 잘 모르던 여자 친구의 입장에선 서운할 수밖에 없는 포지셔닝이었던 것이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명성을 잇고 있는 선동열, 사실 스타 출신 선수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는 힘들다. 그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는 수많은 명장을 배출했지만, 현역 시절의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한 스타 감독은 찾아보기 힘들다. 현역 감독 가운데에서는 프랭크 로빈슨(워싱턴)이 꼽힐 정도다. 일본도 나가시마(전 요미우리)와 왕정치 감독(소프트뱅크) 정도다. 한국에서도 김재박 현대 감독을 제외하고는 불명예 퇴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타 선수가 스타 지도자가 되기 어려운 데에는 그들이 일반 선수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절대적이다.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선수들을 지도하기 때문이다. 또 주로 접대를 받는 데 익숙해 남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익지 않은 것도 원인이다.
그러나 선동열은 달랐다. 2004 시즌 삼성의 수석 코치로 지도자 생활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그 해 5월 초까지는 팀 방어율 꼴찌라는 기”목을 내며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거기에 투수진의 붕괴 문제가 맞물리면서 삼성은 팀 최다 패인 10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7월로 들어서면서는 얘기가 달라졌다. 팀 방어율을 1위로 끌어올리며 삼성을 출범 이후 처음으로 ‘투수 왕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선동열은 2005년 한국시리즈에 앞서 신인 투수 오승환의 기를 팍팍 살려줬다.
“너는 앞으로 10년간 삼성의 마무리를 책임질 수 있다. 내가 신인이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지녔다.”
결국 이 대회에서 오승환은 최우수선수가 되었고, 삼성은 대망의 우승컵을 안았다. 이는 그가 자기 자리에서 확실하게 일을 했기 때문이다. 선수에게는 칭찬과 믿음으로 기량을 극대화시켰고, 코치에게는 정확한 역할 분담으로 책임감을 심어주었고, 구단에게는 그룹의 이미지까지 고려한 처신을 당당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2005년 한국과 일본의 우승팀이 맞붙은 코마니컵에서는 오승환을 지바롯데 소속인 이승엽과 대결시켰다. 국민타자로 일본에서 뛰는 이승엽과 2005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인 오승환의 대결에 한국 팬들은 환호했다. 이는 선동열이 감독의 임무를 잘 알고 있기에 가능했다. 감독은 팬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다.
선동열은 선수가 팀을 이끈다고 본다. 감독이나 코치의 포지션은 뒤에서 표나지 않게 다독거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그는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선수의 능력을 끌어내는 포지셔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선수나 코치에게 하는 말은 단순하다.
“열심히 하자.”
결국 위치에 충실한 역할 수행과 해야 할 말을 분명히 하는 성격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손오공 TV
선동열의 TIP 더 높은 곳에 나를 포지셔닝하고 싶다면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사실 성공이라는 말은 쑥스럽다. 운이 많이 따랐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야구 선수와 감독으로서는 많은 것을 이뤘지만 가정에서는 빵점도 안 되는 마이너스다. 좋은 아빠는 아이와 시간을 많이 갖는 법인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일했다. 선수로서, 코치로서, 감독으로서 한계를 정하지 않고 총력을 기울였다. 그랬기에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신 있게 대답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내가 살아온 방식은 단순하다.
첫째, 열심히 한다. 최선을 다하면 없는 능력도 생긴다. 능력은 개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당히 하면 잠재된 능력을 개발할 수 없다.
둘째, 좋아하는 것을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관심 있는 것을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을 할 때에 비해 훨씬 더 능률이 오른다.
셋째,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제의 방식을 오늘에 적용하면 발전이 없다. 일이 주어지면 골똘하게 생각하고 꼭 이룬다는 신념으로 행동해야 한다.
참조 : 즐기는 축구로 정상을 차지한 축구선수 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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